새와 나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있으면
마음이 평화로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면 깊숙한 나도 모르는 곳에서
밀려오는 알 수 없는 이것
벗어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일까
언어가 사라진 정적이
드리워진 시간이 오래되었다
말을 안 하니 말 하는 것이 어눌해진다
새 한 마리 푸른 나무에 앉은 것을 보았다
푸른 잎과 한 마리 새
나는 마음을 뻗어 새를 안았다
영원한 것은 없을까
절망이나 희망도 없는
새는 지금쯤 어느 곳을 날고 있을까
새는 나의 눈빛을 보았을까
그는 자유로울까 -한희원
마르코피 수도원은 1934년 공산당에 의해 폐쇄되는 수난을 당한다. 1950~1960년에는 노숙자들의 쉼터로 사용되다가 1980년 후반에서야 조지아 대주교 일리아 2세에 의해 수도원으로 복원되었다. 마침 우리 일행이 수도원에 당도했을 때가 미사를 드리는 시간이었다. 몇 사람만 들어서도 꽉 찰 것 같은 예배당 안에서 건장한 사내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어둠에 싸인 성당 안 작은 창문으로 빛이 흘러 들어와 살며시 우리 곁에 앉았다.
햇빛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사내의 등을 따뜻이 비추었다. 성가 한 소절 없는 성당 안에 검은 미사복을 입은 조지아 정교회 신부님의 기도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화에 그려진 거룩한 선지자들이 우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초를 몇 개 사서 불을 켜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조지아에서 살다보면 기도가 일상이 된다. 처음에는 기도하는 내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길에서 교회나 성당을 향해 성호를 긋고 기도하는 조지아인들이 흔해 자연스레 가던 길을 멈춰 서서 나도 그들처럼 기도를 드린다. 기도는 신과 나, 나와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영혼의 끈이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간절한 기도가 서로의 영혼을 두텁게 연결해주는 가교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조지아인들이 오랫동안 수많은 강대국의 침범과 찬탈을 겪으면서도 민족의 고유함을 잃지 않고 지금까지 지탱할 수 있었던 것도 신앙의 힘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산 속에서 천오백 년을 견뎌온 성당이나 석조로 지은 건물 안에서 드리는 침묵의 기도. 긴 시간 마음속에 누적되었던 고통의 늪을 맑은 샘물로 정화시켜 준 것이 기도였다. 그래서인지 조지아에 와서 나도 모르게 고백의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수많은 세월이 묻어 있는 이끼 자욱한 돌벽에 기대어 신을 향해 읊조리는 고백기도가 영혼에 눈물자국만큼이나 선명하다.
여기 수도사들은 예배당 옆에서 함께 생활한다. 검은 미사복을 입은 수도사들이 마당에서 관광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따뜻함보다는 엄숙함이 느껴졌다. 신을 향한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수도원을 나오니 산 정상에 등대처럼 높게 쌓인 성곽이 보였다. 가쁜 숨을 내뱉으며 산길을 따라 오르는데 정상까지 한참 걸릴 것 같았다. 그때 우리와 반나절을 함께 하기로 한 택시운전사가 길을 안내하겠다며 나섰다. 키가 족히 190㎝나 되는 건장하고 다부진 체격의 젊은 운전사로 산을 오르는 모습이 흡사 훈련을 받은 전투병처럼 거침없이 빨랐다.
택시 운전사는 용병출신으로 조지아의 내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이였다. 나는 듯 산을 오르는 그를 따라 헉헉거리며 정상에 있는 성곽에 다다랐다. 성곽은 돌로 쌓은 둥근 모형의 등대 모습으로 성곽 위에 철로 된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성곽 꼭대기까지 올라가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기다랗게 성벽이 산을 가로지르는 풍광이 펼쳐졌다. 가파른 성벽 위에도 나무 십자가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이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여겨져 가슴이 너무 아렸다. 게다가 절반정도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썩어 들어가 성벽에 기댄 채 처연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문득 얼마 전에 택시를 타고 교외로 나가 산길을 달리다가 낭떠러지가 있는 전망 좋은 곳에서 운전수가 차를 멈추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런데 뜻밖에도 낭떠러지 바로 옆에 작은 철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늙은 운전사는 십자가에 붙어 있는 젊은 남자의 사진을 만지며 한참동안 애련하게 기도를 했다. 그의 눈가에 이슬방울 같은 눈물이 맺혀 흘렀다. 택시에 오른 후 연유를 물으니 얼마 전에 그 자리에서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었다는 가슴 아픈 사연을 들려주었다. 조지아에서는 사고가 난 장소에 작은 십자가를 세우고 사자의 명복을 기린다.
트빌리시 시내에는 만족할 만큼 충분히 걸을 수 있는 숲이 거의 없다. 아름다운 공원들이 곳곳에 있으나 규모가 작아 산책이 싱겁게 끝난다. 올드타운 나리칼라 요새 위편에 조지아 국립식물원이 있지만 입장료가 있고 너무 정형화된 모습이라 실망스러워 자주 가지 않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친구들과 땀을 흘리며 Ialno산에 오르니 몸속의 신경세포들이 일제히 살아나 활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몸의 세포와 정신의 세포가 꿈틀거려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성곽 위에 올라 산 아래를 보면서 상큼한 바람에 그동안 가슴에 쌓아두었던 외로움과 답답함, 우울함과 불안함을 몽땅 털어 날려 보냈다. 그러고 난 후 수도원의 묵은 정적을 뒤로하고 바람을 안고 택시를 탔다. 택시 안에서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 말을 아꼈다.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정적이 택시 안을 가득 채웠다. 마르코피 수도원의 고요한 고독만을 남겨두고 우리는 떠나왔다.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