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그린 그림
-피로스마니의 그림자-
늙은 나무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와 겹친다
겹쳤다 흩어졌다 한다
그림자가 겹치면
어둠이 더 짙다
바깥의 어둠은 나무의 긁힌자국을 감추고
안의 어둠은 나의 상처를 감춘다
눈물로 그린 그림은
그림자가 짙어질 때 볼 수 있다
형상과 형상이 하나가 될 때
이때다. 언어를 잃어버린 시간이다
어느, 화가가 길을 걷는다
흰 체리꽃이 눈부시다
하얀꽃 하얀잎들
아 짙어가는 시간
흑색의 그림자가 체리꽃잎에 부서진다
횟빛건물에 기대어
그의 체온을 받아 드린다
오랫동안이었다
그대로 있는 시간이
그림자 눈물 흘린다
(한희원)
니콜 피로스마니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주위 동료화가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혹평에 시달렸다.
그를 위로해준 곳은 어둡고 암울한 지하실이었다. 1918년 4월 9일 그의 나이 55살 때 곁을 지켜주는 이 아무 없이 지하실에서 홀로 숨을 거둔다. 신원미상의 행려병자로 취급되어 지금은 실제 묘지를 확인할 수 없다. 중섭이 지친 영혼을 거두는 순간과 겹친다. 고흐도 죽기 전 그의 영혼을 위로해 준 것은 언덕으로 가는 길에 바람에 흔들리는 누런 밀밭 길과 검은 까마귀 떼와 사이프러스 사이로 빛나던 별들뿐이었다. 위대함 속에는 고통이라는 반석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의 화가 피로스마니에게는 슬픈 전설의 사랑이 있다. 상점 간판을 그리던 날 프랑스 출신 여배우 마가레트가 트빌리시로 순회공연을 오게 되었다. 그녀를 본 피로스마니는 무엇에 홀린 듯 사랑에 빠지게 된다. 미칠 듯한 사랑은 영혼을 혼미하게 하는지 가난한 피로스마니는 사랑의 열병을 이기지 못하고 전 재산을 팔아 수많은 장미꽃을 사서 그녀가 단 하루 묵는 호텔광장과 창문에 장식하여 호소한다. 가난한 화가가 뿌린 수만 송이의 붉은 장미, 그것을 거들떠보지 않는 오만한 여배우. 아픈 사랑의 절정이 펼쳐지게 되고, 마가레트는 얼마 후 다른 남자와 파리로 떠나버린다.
피로스마니가 죽은 후 러시아의 대표 시인 안드레이 보즈엔센스키가 그의 애절한 사랑을 시로 쓰게 되고 라트비아 가요 ‘마리냐가 준 소녀인생’이란 곡에 가사를 붙여 ‘백만송이 장미’가 탄생된다. 이 노래는 러시아 가수 알라 푸가 초마가 불러 세계에 알려졌다.
알라 푸가초마는 공연의 마지막 무대에서는 붉은 장미를 관객에게 던지며 노래했다. 피로스마니의 영혼은 지금도 잠들지 못하고 살아서 떠돌고 있는 것 같다.
한 화가가 살았네 홀로 살고 있었지
그는 꽃을 사랑하는 여배우를 사랑했다네.
그래서 자신의 집을 팔고, 자신의 그림과 피를 팔아
그 돈으로 바다도 덮을만큼 장미꽃을 샀다네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붉은 장미
창가에서 창가에서 창가에서 그대가 보겠지
사랑에 빠진 사랑에 빠진 사랑에 빠진
누군가가 그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꽃으로 바꿔놓았다오 (후렴)
그대가 아침에 깨어나면 정신이 이상해질지도 몰라
마치 꿈의 연장인 것처럼 광장이 꽃으로 넘쳐날 테니까
정신을 차리면 궁금해 하겠지 어떤 부호가 여기다 꽃을 두었을까하고
창 밑에는 가난한 화가가 숨도 멈춘 채 서 있는데 말이야
만남은 너무 짧았고 밤이 되자 기차가 그녀를 멀리 데려가 버렸지
하지만 그녀의 인생에는 넋을 빼앗길 듯한 장미의 노래가 함께 했다네
화가는 혼자서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삶에도 꽃으로 가득찬 광장이 함께 했다네
(백만송이 장미 러시아 원곡 가사)
세월이 흘러 프랑스에서 피로스마니의 대 회고전이 열렸을 때 늙은 여배우 마가레트는 그의 그림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진정 자기를 사랑한 사람은 피로스마니라 되뇌며.
니콜 피로스마니의 그림은 조지아에 오면 가장 많이 접하는 그림이다. 그의 작품들은 디자인으로 제작되어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렇게 천대받고 사랑을 잃고 떠돌던 피로스마니는 죽은 후에야 국민적 영웅이 된 것이다.
트빌리시의 루스타벨리 시가지에 있는 국립미술관에 가면 1800년대부터 조지아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데 미술관 2층에 피로스마니관이 따로 마련되어 그의 대표작 수십 점을 볼 수 있다. 어둡고 암울하지만 소박한 눈빛으로 살아가는 조지아의 모습을 그린 작품은 조지아의 다른 작가에게서 느낄 수 없는 울림을 준다.
숙소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만나는 지하실 방에 있는 피로스마니의 집. 그의 가난한 영혼이 느껴지는 그 남자의 집. 눈물이 가득고인 거리의 풍경이 산책길을 돌아선 날 내 등뒤에 느껴진다. 내 가슴에도 백만송이 장미가 피어있다.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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