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스퀘어 레스토랑에 앉아
좀처럼 떠나지 못하는
안개가 거리를 서성인다
차들은 먼 길을 달려 왔는지
먼지가 덮인 채로
붉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린다
할 말을 다 못하고 머뭇거리는 흐릿함이
어슬렁거리며 떠돌고 있는데도
용감한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공원 나무아래에서 떠들고 있다
연인들은 카페 안에서 서로의 장막을 치고
그들의 공간 속으로 들어갔다
저녁은 아무런 기다림도 없이 다가왔다
안개가 스멀스멀 지나간 후
바람은 불쑥 찾아온
저녁을 비웃듯 흔들고
늙은 청춘은 혼자 앉아 술잔을
비우는 나를 보고 지나간다
술잔은 세잔의 정물처럼
쓰러지지 않고 있는데
런던 스퀘어 레스토랑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마스카니 간주곡은 나를 흔든다
오래 된 서랍 속에 구겨 넣은
낡은 수첩에 적힌 잊혀진 사랑이
찾아와 옆에 앉는다
밤이 되면 찾아오는 각혈처럼
짙은 어둠이 오려는지
가슴이 쓰리고 아파온다
이별이 등을 토닥거리듯
수은등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고
사람들은 뒷골목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다
사랑을 잃어버린 나는 몸을 숨기고
어둠의 색으로 변해가는
에런스톤의 사이프러스 나무들만 떠나지 않고
무심히 나를 바라본다
시간의 끝에 다다르면
그림자 속의 너를 찾을 수 있으려나
서글픈 저녁은 이렇게 가고
나는 비틀거리며 밤을 걷는다
(한희원 ‘런던 스퀘어 레스토랑에 앉아’)
-한희원 ‘결코 그리지 않는 그림-고흐의 편지에서’
‘오래 전 서랍 속에 구겨 넣은 낡은 수첩에 적힌 잊혀진 사랑이 찾아와 옆에 앉는다.’
트빌리시는 오래 걸을 수 있는 숲길을 찾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동네 곳곳에 작은 공원들이 있어 시민들의 쉼터가 되어준다. 익숙하지 않은 동네를 걷다가 작은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울창한 숲이 조성된 공원 안에 놀이기구가 있어서 동네 아이들이 모여 떠들며 놀고 있었다. 몇몇 어른들은 벤치에 느슨하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갓난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끄는 아낙네들도 보인다. 공원 귀퉁이에서 은밀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남녀도 눈에 띈다.
공원 안쪽에 ‘런던 스퀘어’라는 간판을 단 운치 있는 레스토랑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 조지아 맥주를 주문했다. 조지아는 와인이나 맥주가 저렴해서 애주가들에게는 최상의 곳이다. 조지아 맥주는 3~4라리로 우리 돈으로 1천200원 정도면 마실 수 있다. 가난한 술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조지아다.
트빌리시를 여행하다보면 곳곳에 와인 바가 산재되어 있다. 여행을 하면서 집이나 가게에서 만든 와인을 맛보지 못했다면 조지아 여행의 묘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집에서 와인을 만들기 때문에 와인의 종류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가격이 저렴하다. 동네 작은 가게에서 우리 돈 몇 천원 정도면 와인을 골라 음미할 수 있다. 20~40라리 정도면 맛이 뛰어난 와인을 즐길 수 있다.
‘런던 스퀘어’레스토랑에서 오랜만에 마신 맥주 한 잔에 취기가 올라온다. 친구나 동료가 없는 이국땅에서 술은 조심해야 할 대상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공원이 조금씩 어둠으로 물들어 간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마스카니 간주곡이 마음을 흔든다. 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시간을 정지하듯 서 있다. 천천히 옅은 안개가 찾아왔다. 먼 길을 떠나온 차들은 먼지가 수북이 덮인 채로 붉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지나간다. 그리움을 오래된 서랍 속에서 꺼내 손에 쥐어 본다. 거리에 저녁을 밝히는 수은등이 하나 둘 켜진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 채 따라오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자바하시빌리에 가로등이 꺼지고, 거리는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의지하고 있다.
숙소에 들어서니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던 검은 고양이가 입구에 앉아있다. 아파트에 사는 할머니는 고양이를 자식처럼 돌본다. 검은 고양이는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가 어느 날부터 하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앉아 있곤 한다. 할머니는 거리와 붙어있는 담벼락에 여러 종류의 꽃을 심고 가꾼다. 그 꽃 중에 분꽃이라니!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라 고향 생각이 저절로 피어났다. 나팔꽃과는 달리 저녁에만 피는 분꽃은 은은한 여인의 향내가 나는 꽃이다. 여름이 오면 저녁 무렵에 소박하게 분내를 풍기는 예쁜 분꽃을 볼 수 있으리라.
숙소 옆 러시아 정교회 건너편에는 매일같이 하루 종일 꽃을 파는 할머니가 두 분 계신다. 돈을 받고 파는 꽃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꽃이 먼지투성이고 시들어 있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는 하루 종일 앉아 그런 꽃을 판다. 트빌리시 거리에서는 야생화를 무더기로 꺾어다가 파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광경들이 또 있다. 체중계를 길에 내놓고 몸무게를 재주기도 하고, 담배를 한 개비 씩 팔기도 한다. 오래된 책을 길에 널어놓고 파는 모습도 흔하다. 이런 가난한 풍경에서 아련한 애수와 향수, 그리움이 전해온다. 가난하지만 쓸쓸하면서 아름다운 이 풍경들은 영원히 간직할 소중한 장면들이다.
밤늦은 시간까지 검은 콩테로 그림을 그렸다. 꽃을 파는 할머니의 구부정한 뒷모습과 검은 소파, 검은 고양이의 모습, 이국이지만 어디서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닮아 있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서로의 손을 잡아주고, 주머니가 텅 빈 술꾼들이 비틀거리는 영혼을 채울 수 있는 곳. 트빌리시 밤은 오늘도 깊어간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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