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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원의 트빌리시편지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6> 서랍에 구겨넣은 낡은 사랑

입력 2019.12.12. 19:23 @조덕진 mdeung@srb.co.kr
수백년 시간 담긴 하우스 와인 향이 도시를 감싸고
붉은지붕이 있는 트빌리시거리

런던 스퀘어 레스토랑에 앉아

좀처럼 떠나지 못하는

안개가 거리를 서성인다

차들은 먼 길을 달려 왔는지

먼지가 덮인 채로

붉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린다

할 말을 다 못하고 머뭇거리는 흐릿함이

어슬렁거리며 떠돌고 있는데도

용감한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공원 나무아래에서 떠들고 있다

연인들은 카페 안에서 서로의 장막을 치고

그들의 공간 속으로 들어갔다

저녁은 아무런 기다림도 없이 다가왔다

안개가 스멀스멀 지나간 후

바람은 불쑥 찾아온

저녁을 비웃듯 흔들고

늙은 청춘은 혼자 앉아 술잔을

비우는 나를 보고 지나간다

술잔은 세잔의 정물처럼

쓰러지지 않고 있는데

런던 스퀘어 레스토랑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마스카니 간주곡은 나를 흔든다

오래 된 서랍 속에 구겨 넣은

낡은 수첩에 적힌 잊혀진 사랑이

찾아와 옆에 앉는다

밤이 되면 찾아오는 각혈처럼

짙은 어둠이 오려는지

가슴이 쓰리고 아파온다

이별이 등을 토닥거리듯

수은등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고

사람들은 뒷골목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다

사랑을 잃어버린 나는 몸을 숨기고

어둠의 색으로 변해가는

에런스톤의 사이프러스 나무들만 떠나지 않고

무심히 나를 바라본다

시간의 끝에 다다르면

그림자 속의 너를 찾을 수 있으려나

서글픈 저녁은 이렇게 가고

나는 비틀거리며 밤을 걷는다

(한희원 ‘런던 스퀘어 레스토랑에 앉아’)

-한희원 ‘결코 그리지 않는 그림-고흐의 편지에서’

‘오래 전 서랍 속에 구겨 넣은 낡은 수첩에 적힌 잊혀진 사랑이 찾아와 옆에 앉는다.’

트빌리시는 오래 걸을 수 있는 숲길을 찾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동네 곳곳에 작은 공원들이 있어 시민들의 쉼터가 되어준다. 익숙하지 않은 동네를 걷다가 작은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울창한 숲이 조성된 공원 안에 놀이기구가 있어서 동네 아이들이 모여 떠들며 놀고 있었다. 몇몇 어른들은 벤치에 느슨하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갓난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끄는 아낙네들도 보인다. 공원 귀퉁이에서 은밀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남녀도 눈에 띈다.

공원 안쪽에 ‘런던 스퀘어’라는 간판을 단 운치 있는 레스토랑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 조지아 맥주를 주문했다. 조지아는 와인이나 맥주가 저렴해서 애주가들에게는 최상의 곳이다. 조지아 맥주는 3~4라리로 우리 돈으로 1천200원 정도면 마실 수 있다. 가난한 술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조지아다.

트빌리시를 여행하다보면 곳곳에 와인 바가 산재되어 있다. 여행을 하면서 집이나 가게에서 만든 와인을 맛보지 못했다면 조지아 여행의 묘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집에서 와인을 만들기 때문에 와인의 종류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가격이 저렴하다. 동네 작은 가게에서 우리 돈 몇 천원 정도면 와인을 골라 음미할 수 있다. 20~40라리 정도면 맛이 뛰어난 와인을 즐길 수 있다.

‘런던 스퀘어’레스토랑에서 오랜만에 마신 맥주 한 잔에 취기가 올라온다. 친구나 동료가 없는 이국땅에서 술은 조심해야 할 대상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공원이 조금씩 어둠으로 물들어 간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마스카니 간주곡이 마음을 흔든다. 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시간을 정지하듯 서 있다. 천천히 옅은 안개가 찾아왔다. 먼 길을 떠나온 차들은 먼지가 수북이 덮인 채로 붉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지나간다. 그리움을 오래된 서랍 속에서 꺼내 손에 쥐어 본다. 거리에 저녁을 밝히는 수은등이 하나 둘 켜진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키 큰 나무들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 채 따라오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자바하시빌리에 가로등이 꺼지고, 거리는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의지하고 있다.

숙소에 들어서니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던 검은 고양이가 입구에 앉아있다. 아파트에 사는 할머니는 고양이를 자식처럼 돌본다. 검은 고양이는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가 어느 날부터 하얗게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앉아 있곤 한다. 할머니는 거리와 붙어있는 담벼락에 여러 종류의 꽃을 심고 가꾼다. 그 꽃 중에 분꽃이라니!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라 고향 생각이 저절로 피어났다. 나팔꽃과는 달리 저녁에만 피는 분꽃은 은은한 여인의 향내가 나는 꽃이다. 여름이 오면 저녁 무렵에 소박하게 분내를 풍기는 예쁜 분꽃을 볼 수 있으리라.

숙소 옆 러시아 정교회 건너편에는 매일같이 하루 종일 꽃을 파는 할머니가 두 분 계신다. 돈을 받고 파는 꽃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꽃이 먼지투성이고 시들어 있다.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는 하루 종일 앉아 그런 꽃을 판다. 트빌리시 거리에서는 야생화를 무더기로 꺾어다가 파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광경들이 또 있다. 체중계를 길에 내놓고 몸무게를 재주기도 하고, 담배를 한 개비 씩 팔기도 한다. 오래된 책을 길에 널어놓고 파는 모습도 흔하다. 이런 가난한 풍경에서 아련한 애수와 향수, 그리움이 전해온다. 가난하지만 쓸쓸하면서 아름다운 이 풍경들은 영원히 간직할 소중한 장면들이다.

밤늦은 시간까지 검은 콩테로 그림을 그렸다. 꽃을 파는 할머니의 구부정한 뒷모습과 검은 소파, 검은 고양이의 모습, 이국이지만 어디서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닮아 있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서로의 손을 잡아주고, 주머니가 텅 빈 술꾼들이 비틀거리는 영혼을 채울 수 있는 곳. 트빌리시 밤은 오늘도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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