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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 봄비는 체리꽃 향기를 품고
입력 : 2019년 11월 14일(목) 15:21


그리움이 더 짙은 그리움과 만나다
꽃과 귀향
내가 사는 곳은 자바하시빌리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곳은 트빌리시에서 러시아시대부터 노동자들이 살았던 조촐한 동네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곳이 좋았다. 먼지 묻은 신작로처럼 거리는 느슨했고 옛 영화를 잃어버린 건물들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아파트나 관광명소가 늘어서 있는 도시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거리에는 수십 수백 년도 됨직한 아카시아와 플라타너스가 즐비하게 서있어 길을 걸을 때는 나무들을 피해 걸어야만 했다. 숙소에서 조금 걸어가면 녹색으로 칠한 크렘린 궁전의 지붕을 연상케 하는 러시아 정교회가 보인다. 그곳을 지나 더 걸어가면 마르자니쉬빌리 지하철역이 나온다. 거리의 사람들은 표정이 없이 걸었다. 걸인들은 교회 앞에 앉아 돈을 요구하고, 덩치 큰 조지아 사내들이 묵직하게 걸었다. 그들은 뜨거운 열정과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연스레 배인 감성을 왜 평소에는 잘 드러내지 않는지 모르겠다.

러시아 정교회 가는길


조지아의 지하철은 150m 정도를 아래로 내려가야 탈 수 있다. 처음 지하철역 위에서 내려다 본 광경은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로 아찔했다. 몇몇 사람들은 앉아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마르자니쉬빌리에서 올드타운 시내 쪽으로 가려면 루스타벨리, 리버티스퀘어(자유의 광장, 올드타운) 방향으로 지하철을 타야한다. 루스타벨리는 시가지가 러시아풍의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주위에 자리 잡은 곳이다. 쇼타 루스타벨리는 11세기 조지아의 유명한 시인의 이름이다. 6월 시위 현장이었던 국회의사당, 오페라하우스, 현대미술관, 국립미술관, 국립박물관이 좌우에 서있어 걸으면 오래된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든다. 그러나 나는 아직 길이 익숙하지 않은 이방인이며 혼자다.

우선은 루스타벨리에 있는 화방을 찾아야 한다. 인구가 100만이 넘어가는 도시에 화방은 두 세군데 뿐이고 규모도 열악하다는 정보를 얻었다.

귀향


트빌리시의 가게에서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손님들에게 친절하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동양인에게 더 그런 것 같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화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도 눈길도 주지 않고, 말도 걸지 않을뿐더러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는다. 사려면 사고 아니면 말라는 투이다. 이 화방만 그런 것이 아니다. 숙소 앞에 있는 가게를 매일 들락거려도 점원 아가씨가 웃지도 않고 눈길도 없다. 화방에서 몇 가지 화구를 샀는데 가격이 비싸다. 조지아는 소득수준이 낮기 때문에 생필품과 식료품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전문적인 용품은 조지아에서 생산하지 않아 거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관계로 무척 비싸다. 그것도 대부분이 러시아와 중국산인데 화방에서 우리나라 ‘알파’ 상품이 있어서 무척 반가웠다.

바람부는 날 영산강


화구를 사서 숙소에 들어왔다. 천으로 깐 바닥 위에 이젤을 펴고 합판에 종이를 붙였다. 고민 끝에 여기서는 유화작업을 하지말자로 결정했다. 유화작업을 할 경우 숙소가 훼손되는 문제가 있고 완성 후에 광주로 가지고 가는 일이 생각보다 복잡했다. 유화는 마르기까지 일정 기간이 필요하기에 여기에 거주하는 동안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하기 힘들었다. 40년간 사용했던 유화를 접고 다시 소묘와 수채화를 처음 공부하는 마음으로 임하고 싶었다. 이런 작업을 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잠재된 세계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예술가에게 새로운 세계를 찾는 일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위험한 여정과 같다. 자연스럽지 않은 새로움은 자칫하면 지금까지 이룩한 자기다움을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의 기도


화실로 삼은 거실을 정리하고 검은 소파에 앉았다. 창 밖에는 갑자기 불어 닥친 돌풍에 창문이 흔들린다. 조지아는 가끔 무서울 정도로 바람이 거칠게 지나간다. 소파에 앉아 천장을 응시했다. 두고 온 영산강변이 생각났다. 강변의 나무들은 잎이 다 떨어져 앙상했다. 하늘은 회색빛으로 가득했다. 강변을 따라 서 있는 억새가 우수수 울고 움푹 파인 길에는 방금 지나간 빗물이 고여 하늘을 담고 있었다. 바람은 차가웠으나 고국의 강변길은 내 마음을 따듯한 우수에 젖게 했다. 곧이어 밖에서 비가 내렸다. 회색빛 건물이 짙게 변해갔다.



비 내리는 날 자바하시빌리



존 윌리엄스의 기타소리를 들으며

비가 내리는 창 밖 자바하시빌리의 거리를 바라본다

바흐의 기타선율

교회로 가는 길에 서 있는 낡은 건물에 스며든다

봄비는 체리꽃 향기를 품고 거리를 적신다

옛 영화를 버린 건물의 벽에 걸린

오래된 신화의 조각들이 비에 젖는다

건물들은 짙은 회색빛으로 잠겨든다

사람들은 비를 맞으며 담배를 문 채 길을 걷는다

거리의 끝 사거리에

녹색 둥근 지붕의 러시아 정교회가 보인다.

교회의 십자가가 물기에 젖은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기도하는 나무

나뭇잎들이 기도하는 시간

길을 걷다 멈추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나무를 닮았다

기타의 선율소리가 격렬해지다 멈춘다

말과 말 사이의 침묵

그림속의 여백

여백에도 형체가 있고 색이 있다

침묵에도 소리가 있음을

창밖으로 비에 젖어가는 거리를 보는 순간

므뜨끄바리강이 가슴에까지 밀려와 흐른다

지금 나를 흔드는 것이 강뿐이겠는가

산 벚꽃이 피어있을까

그곳에는 산 벚꽃이 지고 있을까

그대가 피어있을까

그대가 지고 있을까

여기는 체리꽃이 비에 젖고 있는데

(한희원 시 비 내리는 날 자바하시빌리 전문)



트빌리시 거리에 가면 하얀 체리꽃이 한창이다. 안개가 끼는 날이면 섬진강의 매화처럼 체리꽃이 몽롱해진다. 그리움이 더 짙은 그리움과 만난다. 하루 종일 밖에 나가지 않고 검은 소파에 앉아있는 날이 많다. 침묵에도 소리가 있고 여백에도 형체나 색이 있다. 이러다 말을 잃고 모국어를 잃을까 싶다. 트빌리시에 온지 며칠이 지났다.





한희원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하고 있다.